솔직히 저는 에보라를 그냥 세비야에서 리스본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이름도 생소한 경유지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지도 앱에 찍어보니 구시가지 크기가 말도 안 되게 작아서 "30분이면 다 보겠다"고 흘려봤거든요. 그런데 막상 발을 들여놓으니 상황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로마 시대 신전이 골목 모퉁이에 툭 나타나고, 16세기 석조 수로가 민가 지붕 위로 뻗어 있는 도시는, 제가 기대치를 낮춰서 더 강하게 느꼈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무언가 있는 곳이었습니다.유적지만 2,000년 — 에보라 구시가지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이유에보라 구시가지는 198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 등재됐습니다. 여기서 세계문화유산이란 유네스코가 인류 전체의 관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
영국에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단 두 곳뿐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그 중 하나가 바로 서머싯(Somerset)에 위치한 바스(Bath)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막연하게 '온천 있는 조용한 영국 지방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직접 발을 디뎌보니, 2,000년의 시간이 거리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도시였습니다.로마 온천과 펄트니 다리 — 2,000년이 한 골목에 공존하는 곳혹시 '목욕탕'이 도시 이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바스(Bath)가 정확히 그 경우입니다. 로마인들이 서기 1세기경 이곳에 정착지를 조성하면서 아쿠아에 술리스(Aquae Sulis)라고 불렀는데, 이는 켈트족 여신 술리스의 이름에서 따온..
폴란드 즈워티(PLN)와 유로화의 환율 차이가 무려 1즈워티 이상 벌어지는 환전소 앞에서 저는 그냥 지갑을 닫았습니다. 브로츠와프(Wrocław)는 바르샤바나 크라쿠프보다 훨씬 덜 알려진 도시지만, 직접 걸어보고 나서야 이곳이 왜 동유럽 여행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입소문을 타는지 이해했습니다. 구시가지 한 바퀴를 다 돌고 마트에서 장을 봐서 숙소에서 비빔면에 삼겹살을 올려 먹기까지, 제가 경험한 브로츠와프를 수치와 함께 솔직하게 풀어봅니다.구시가지와 난쟁이 조각상, 관광지 감성 뒤에 숨겨진 역사브로츠와프 중앙시장 광장(Rynek)에 도착했을 때 첫인상은 "색깔이 너무 많다"였습니다. 노란색, 분홍색, 초록색 건물들이 빼곡하게 광장을 둘러싸고 있어서 처음엔 세트장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낮에 보는 광..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를 타고 딱 2시간 반 만에 국경을 넘었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 시간도 안 걸렸는데 나라가 바뀌다니, 그 이질감이 묘하게 좋았습니다. 브라티슬라바는 처음엔 별거 없어 보이는 도시인데, 천천히 걷다 보면 이 도시만의 리듬이 느껴집니다. 반나절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가 하루가 훌쩍 지나 있는 그런 곳입니다.구시가지, 기대 없이 갔다가 발이 묶였습니다처음 스타레 메스토(Staré Mesto)에 발을 들였을 때, 솔직히 "이게 수도 맞아?" 싶었습니다. 스타레 메스토란 브라티슬라바의 구시가지 구역을 뜻하는 슬로바키아어로, 쉽게 말해 도시의 역사 중심부입니다. 면적이 크지 않아 20~30분이면 한 바퀴 돌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막상 들어가니 카페마다 앉고 싶..
암스테르담 일정이 이틀쯤 남았을 때, 운하는 이미 봤고, 라이크스뮤지엄도 다녀왔고, 관광객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게 슬슬 피곤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원래는 쾨켄호프 튤립 축제를 갈 생각이었는데, 시기가 맞지 않아 꽃이 충분히 피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즉흥적으로 선택한 곳이 위트레흐트(Utrecht)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이번 네덜란드 여행에서 제가 가장 잘한 선택이었습니다.암스테르담보다 운하가 더 좋았던 이유위트레흐트 중앙역에 내려 구시가지 쪽으로 걸어가다 처음 아우데흐라흐트(Oudegracht)를 봤을 때, 제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아우데흐라흐트란 '오래된 운하'라는 뜻의 네덜란드어로, 위트레흐트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중세 시대부터 이어진 수로입니다.암스테르담..
그리스 여행을 떠난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열에 아홉은 산토리니 얘기를 꺼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로도스섬을 선택했고, 중세 기사단이 쌓은 성벽 도시, 에메랄드빛 에게해, 그리고 야간 페리 위에서 벌어진 날짜 착각 사건까지. 로도스는 제가 그리스에서 기대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그리스에 중세 유럽이 있다고요? — 로도스 구시가지의 정체하얀 건물에 파란 지붕, 그게 그리스 아닌가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로도스 구시가지 성문 안으로 처음 발을 들여놓던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지중해 풍경이 아니라 중세 유럽 어딘가의 돌길이었습니다.로도스 구시가지는 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세계문화유산이란 인류..
저는 루마니아를 꽤 오랫동안 여행 후보에서 빼놓고 있었습니다. 동유럽이면 부다페스트나 프라하가 먼저 떠오르고, 루마니아는 왠지 '나중에'라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브라쇼브(Brașov)에서 한 달을 지내보고 나서야 제가 얼마나 편견을 가지고 있었는지 깨달았습니다. 중세 구시가지, 카르파티아산맥의 바람, 삼겹살 1kg에 4,500원짜리 돼지고기까지. 이 글은 그 한 달의 기록입니다.브라쇼브 구시가지, 직접 걸어보니 이런 곳이었습니다브라쇼브 여행을 처음 검색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오는 사진이 뭔지 아시나요? 붉은 지붕이 겹겹이 쌓인 골목길, 그리고 회색빛 뾰족한 탑입니다. 저도 그 사진 보고 '예쁘겠다' 싶었는데, 직접 걸어보니 예상과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습니다.올드타운의 중심은 의회 광장(Piața..
저는 리가(Riga)를 목적지로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폴란드 크라쿠프로 가는 직항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경유지로 잡은 도시였거든요. 그런데 막상 발을 들여놓고 나서는 "여기 집 구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발트해 연안의 라트비아 수도 리가, 기대 없이 갔다가 가장 오래 머물고 싶어진 도시 이야기입니다.아르누보 거리, 예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습니다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걷는 내내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소비에트 시절 지어진 콘크리트 블록 아파트들이었고, 탈린의 동화 같은 올드타운이 자꾸 머릿속에 밟혔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탈린에 하루 더 있을걸"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그런데 아르누보(Art Nouveau) 지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몰타는 제주도의 6분의 1 크기입니다. 그 작은 섬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수도가 있고, 카라바조의 유일한 서명작이 있습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솔직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크루즈 기항지로 6시간짜리 일정이었는데, 막상 내리고 나서는 "왜 여기서 더 못 있지"라는 말이 절로 나왔습니다.임디나: 오전에 가야 진짜 맛이 나는 침묵의 도시크루즈에서 내려 제일 먼저 향한 곳이 임디나(Mdina)였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약 40분, 항구에서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도착하는 순간 시간이 멈춘 느낌이었습니다.임디나는 '침묵의 도시(Silent City)'라는 별명으로 불립니다. 여기서 침묵의 도시란 단순히 조용한 동네라는 뜻이 아닙니다. 발레타가 몰타의 수도가 되기 전, 중세 시대에 이 섬 전체를 호령했던 구..
저는 부다페스트에서 40도 폭염을 버티다 전날 밤 충동적으로 항공권을 끊었습니다. 목적지는 에스토니아 탈린. 35유로짜리 편도 티켓 하나로 시작된 여행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게 그해 가장 만족스러운 이동이었습니다.즉흥 이동의 논리 — 왜 탈린이었나유럽 장기여행을 하다 보면 '날씨 차익 거래'라는 개념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여기서 날씨 차익 거래란 한 도시가 지나치게 더울 때, 비슷한 비용으로 이동할 수 있는 시원한 도시를 찾아 이동하는 전략을 의미합니다. 주식 시장의 차익 거래처럼 온도 차이를 기회 비용으로 환산하는 셈입니다.제가 머물던 부다페스트의 낮 기온은 40도를 넘었고, 밤 11시가 돼도 27~28도가 유지됐습니다. 에어컨이 없는 에어비앤비에서 수면 질이 바닥을 쳤고, 그 상태로 관광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