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영국에서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 단 두 곳뿐이라는 사실, 알고 계셨습니까? 그 중 하나가 바로 서머싯(Somerset)에 위치한 바스(Bath)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접했을 때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막연하게 '온천 있는 조용한 영국 지방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직접 발을 디뎌보니, 2,000년의 시간이 거리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도시였습니다.
로마 온천과 펄트니 다리 — 2,000년이 한 골목에 공존하는 곳
혹시 '목욕탕'이 도시 이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바스(Bath)가 정확히 그 경우입니다. 로마인들이 서기 1세기경 이곳에 정착지를 조성하면서 아쿠아에 술리스(Aquae Sulis)라고 불렀는데, 이는 켈트족 여신 술리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후 이 지역이 영국화되면서 이름이 지금의 '바스'로 바뀌었는데, 솔직히 처음 이 사연을 들었을 때 조금 허탈하기도 했습니다. '그냥 목욕탕이잖아'라는 느낌이랄까요.
로만 바스(Roman Baths)는 그 유적의 핵심입니다. 로만 바스란 로마 시대에 건설된 공공 온천·목욕 시설 유적을 가리키며, 단순히 몸을 씻던 공간이 아니라 종교 의식과 사교, 치유가 동시에 이루어지던 복합 문화 공간이었습니다. 중앙의 그레이트 바스(Great Bath)에 고인 에메랄드빛 온천수를 처음 눈으로 확인했을 때, 저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이 물이 아직도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다는 게 실감이 안 났거든요.
온천수가 초록빛을 띠는 이유가 궁금하셨습니까? 이는 지열수(地熱水), 즉 지하 깊은 곳에서 데워져 올라오는 온천수 속 미네랄이 햇빛과 반응하면서 조류(Algae)가 번식하기 때문입니다. 지열수란 지각 내부의 열에너지로 가열된 지하수를 뜻하며, 바스의 온천수는 지표면에 도달할 때 약 46도에 달합니다. 일반적으로 현재 로만 바스에서 입욕이 금지된 이유를 '세균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는 분들도 있는데, 실제로는 역사유적 보존 문제와 처리되지 않은 온천수의 위생·안전 기준 미충족이 핵심입니다(출처: Roman Baths 공식 사이트). 온천을 직접 체험하고 싶다면 현대식 스파 시설인 테르메 바스 스파(Thermae Bath Spa)를 이용해야 합니다.
로만 바스에서 나오면 바로 눈앞에 바스 수도원(Bath Abbey)이 서 있습니다. 1499년에 본격 건축이 시작된 고딕 양식의 건물로, 외벽 전면을 장식한 석조 천사 조각들이 제 눈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습니다. 입장할 때 소정의 기부금이 요청되는 구조인데, 내부 스테인드글라스와 천장 팬 볼팅(Fan Vaulting)을 보면 아깝다는 생각은 사라집니다. 팬 볼팅이란 천장 구조물이 부채꼴 형태로 펼쳐진 고딕 건축 기법으로, 영국 후기 고딕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펄트니 다리(Pulteney Bridge)는 바스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명소입니다. 18세기에 건설된 이 다리는 다리 위에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는 점에서 피렌체의 폰테 베키오(Ponte Vecchio)와 종종 비교됩니다.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자베르 경감이 뛰어내리는 장면의 배경이기도 한데, 제가 직접 강변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 왜 제작진이 이 다리를 선택했는지 바로 이해했습니다. 다리 위보다 에이번강(River Avon) 강변에서 바라보는 각도가 훨씬 극적입니다.
- 로만 바스 내부 관람 소요 시간: 여유 있게 보려면 최소 1시간 30분 이상 확보 권장
- 그레이트 바스의 초록빛 온천수는 지열수 속 미네랄과 조류 반응의 결과
- 펄트니 다리 포토스팟은 다리 위가 아닌 강변 아래쪽 (레미제라블 촬영 배경)
- 바스 수도원은 입장 시 기부금 요청 방식 운영, 고딕 양식 팬 볼팅 감상 추천
- 실제 온천욕은 현대식 시설 테르메 바스 스파(Thermae Bath Spa) 이용
샐리 런 번과 로열 크레센트 — 기대와 실제 사이의 솔직한 후기
바스에서 꼭 먹어봐야 한다는 음식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샐리 런 번(Sally Lunn Bun), 다른 하나는 바스 번(Bath Bun)입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같은 음식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둘은 완전히 다릅니다. 샐리 런 번은 크고 폭신한 브리오슈 계열의 빵으로, 달콤한 크림부터 햄·치즈 같은 세이보리(Savoury) 토핑까지 다양하게 얹어 먹을 수 있습니다. 세이보리란 단맛이 아닌 짭짤하고 풍미 있는 맛의 방향을 가리키는 식문화 용어입니다.
제가 직접 샐리 런스 히스토릭 이팅 하우스(Sally Lunn's Historic Eating House)에서 먹어봤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현대 디저트 빵처럼 강렬한 단맛을 기대했다면 조금 밍밍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빵 자체보다 토핑의 조합이 맛을 결정하는 구조라서, 레몬 크림을 선택했더니 레몬 향이 빵의 밀 풍미를 잘 잡아줬습니다. 17세기부터 이어온 레시피라는 걸 생각하면, 당시 사람들의 식문화를 체험한다는 쪽으로 기대 수준을 조정하는 게 훨씬 즐거운 경험이 됩니다.
바스 번(Bath Bun)은 설탕과 건포도가 들어간 달콤한 스타일로, 샐리 런 번보다 더 묵직하고 클래식한 단맛이 납니다. 제 경우엔 바스 번이 조금 더 취향에 맞았는데, 포켓몬 빵 같은 그 옛날 설탕 듬뿍 넣은 빵 맛이랄까요. 전통 음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지금 기준으로는 구식이지만, 그 구식에서 오히려 진짜 전통의 맛이 느껴졌습니다. 바스 번은 18세기 영국 상류층이 사교 모임에서 즐겨 먹던 음식으로, 출처: Visit Bath 공식 관광 안내에서도 바스의 대표 전통 음식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음식 이야기에서 로열 크레센트(Royal Crescent)로 넘어가면, 이번엔 규모에서 한 번 더 놀랍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예쁘게 휜 건물이라는 인상이었는데, 실제로 눈앞에 서 보면 '이걸 1767년에 지었다고?' 하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30채의 주택이 초승달 형태로 이어진 조지 왕조(Georgian) 건축의 정수인데, 조지 왕조 건축이란 18세기 영국 조지 1세~4세 시대에 유행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좌우 대칭과 단순하고 균형 잡힌 비율이 특징입니다.
로열 크레센트 앞 잔디밭에서 건물 전체를 바라볼 때, 개별 주택의 굴뚝 수가 집마다 다르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이게 단순한 취향 차이가 아니라 세금 문제였다고 합니다. 당시 영국에서는 굴뚝 수에 따라 세금을 매기는 난로세(Hearth Tax) 제도가 있었고, 부유층은 굴뚝을 많이 냈고 세금을 줄이려는 집은 굴뚝을 줄이거나 막았다고 합니다. 건물 외관 하나에서도 당시 사회의 경제 구조가 읽힌다는 점이, 제가 바스를 단순한 예쁜 관광지 이상으로 기억하게 된 이유입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센터도 로열 크레센트 인근에 있습니다. 오스틴은 1801년부터 약 5년간 바스에 거주했고, 대표작 《설득(Persuasion)》과 《노생거 사원(Northanger Abbey)》에 바스의 사교 문화가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저는 《오만과 편견》 정도는 알지만 바스를 배경으로 한 두 작품은 깊이 읽지 못했는데, 이번 방문 이후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생겼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바스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한가요?
A. 런던에서 기차로 약 1시간 20~40분 거리라 당일치기가 충분히 가능합니다. 다만 로만 바스 내부 관람에만 1시간 30분 이상이 소요될 수 있고, 로열 크레센트까지 포함하면 5~7시간은 잡아야 합니다. 저는 온천 체험 없이 주요 유적만 둘러봤는데도 하루가 꽉 찼습니다.
Q. 로만 바스에서 실제로 온천욕을 할 수 있나요?
A. 로만 바스는 유적 관람 시설이라 입욕이 불가능합니다. 실제 온천욕을 원한다면 바로 근처에 있는 테르메 바스 스파(Thermae Bath Spa)를 이용하면 됩니다. 두 시설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목적에 따라 방문 계획을 달리 세우는 편이 좋겠습니까?
Q. 샐리 런 번과 바스 번은 뭐가 다른가요?
A. 샐리 런 번은 크고 폭신한 브리오슈 스타일 빵으로 달콤하거나 짭짤한 토핑을 얹어 먹고, 바스 번은 설탕과 건포도가 들어간 묵직하고 달콤한 빵입니다.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기 쉬운데, 식감과 맛 방향이 전혀 다르므로 가능하다면 두 가지 모두 먹어보시길 제안드립니다.
Q. 바스에서 코츠월드나 캐슬 쿰으로 이동하기 쉬운가요?
A. 자동차가 있다면 바스에서 캐슬 쿰(Castle Combe)까지 약 30분 내외로 이동할 수 있어 동선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다만 대중교통만으로 코츠월드 깊숙한 마을까지 이동하는 것은 다소 불편하므로, 렌터카 이용을 함께 고려해볼 만합니다.
Q. 바스 시내 주차는 어렵지 않나요?
A. 바스 중심부는 주차 공간이 적고 비용도 높습니다. 외곽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파크 앤드 라이드(Park & Ride) 방식이 훨씬 효율적입니다. 또한 바스 중심부는 차량 배출 기준에 따라 요금이 부과되는 청정공기구역(Clean Air Zone)으로 지정되어 있어, 렌터카 이용 시 미리 확인이 필요합니다.
결론
바스를 다녀오기 전, 저는 이 도시를 '온천 있는 예쁜 지방 도시'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걸어보니 2,000년의 로마 유적과 18세기 조지 왕조 건축, 제인 오스틴의 문학이 하나의 도시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곳이었습니다. 박물관 안에서만 역사를 만나는 게 아니라, 지금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건물과 거리 자체가 역사인 셈입니다.
샐리 런 번이 입맛에 맞지 않아도, 발이 아파 잠깐 앉아 쉬어야 해도, 예상치 못한 비를 맞아도 — 제 경험상 이런 순간들이 오히려 여행을 더 진짜로 만들어 줍니다. 로만 바스와 로열 크레센트를 중심으로 동선을 짜되,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캐슬 쿰이나 테르메 바스 스파를 추가하는 방식을 추천드립니다. 바스는 빠르게 훑고 지나치기보다 천천히 걸을수록 더 많이 보이는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