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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이라고 하면 어디가 먼저 떠오르십니까?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를 떠올리는 분들이 대부분일 텐데, 정작 제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도시는 북쪽 끝에 있는 산세바스티안이었습니다. 흐린 날씨로 시작해 기대감이 반쯤 꺾였는데, 핀초스 골목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감각이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이 글은 그 하루의 기록입니다.
핀초스, 한 집에서 배부르게 먹으면 절반을 잃는 겁니다
구시가지인 파르테 비에하(Parte Vieja)에 들어서는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좁은 골목 양쪽으로 핀초스(Pintxos) 바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는데, 핀초스란 작은 빵 위에 해산물이나 고기, 채소 등을 얹어 이쑤시개로 고정한 바스크 지방 고유의 핑거푸드를 말합니다. 타파스(Tapas)와 자주 혼용되지만, 바스크 지역에서는 핀초스라는 단어가 훨씬 강한 자부심과 함께 쓰입니다.
제가 직접 먹어보니 한 집에서 여러 개를 주문하는 것보다 한두 개씩 먹고 옆 가게로 이동하는 방식이 훨씬 만족스러웠습니다. 이 방식을 현지에서는 포테오(Poteo)라고 부르는데, 여러 바를 돌아다니며 핀초스와 소량의 맥주를 즐기는 문화적 관습을 뜻합니다. 처음엔 그냥 걸어 다니면서 먹는 거겠지 싶었는데, 실제로 해보니 이게 산세바스티안을 경험하는 방식 자체였습니다.
성게를 올린 핀초스를 처음 먹었을 때의 그 녹진한 맛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크림수프를 먹는 것 같은 질감인데, 짭조름하면서도 바다 향이 깔끔하게 올라옵니다. 그다음 먹은 건 소시지 종류였는데, 제가 먹으면서 속으로 "이거 순대 아닌가?"라는 생각이 몇 번이고 들었습니다. 식감이며 안의 내용물이며 정말 비슷했거든요. 마지막에 먹은 새우꼬치는 탱글탱글한 식감이 아니라 생선 살처럼 촘촘하고 담백한 느낌이었는데, 위에 얹힌 토마토 소스가 그 맛을 딱 잡아줬습니다.
핀초스 바를 고를 때 팁이 하나 있다면, 진열대에 보이는 차가운 핀초스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직원에게 "¿Cuál es la especialidad?(꾸알 에스 라 에스페시알리다드?)"라고 물으면 그 집 대표 메뉴를 알 수 있고, 주방에서 바로 만드는 따뜻한 핀초스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 안초아(Anchoa): 멸치 절임. 짭조름하고 깊은 감칠맛이 핀초스의 기본
- 감바스(Gambas): 새우 꼬치. 산세바스티안에서 먹은 건 식감이 생선 살처럼 촘촘했습니다
- 우니(Uni): 성게. 녹진하고 바다 향이 강한데 거부감 없이 먹기 좋습니다
- 풀포(Pulpo): 문어. 부드러운 식감과 파프리카 양념이 잘 어울립니다
- 주리토(Zurito): 소용량 맥주. 여러 집을 이동할 때 부담 없이 곁들이기 좋습니다
미라마르 궁전, 왕실이 혼자 보던 그 바다를 저도 봤습니다
핀초스 골목을 빠져나와 해안 쪽으로 걷다 보면 미라마르 궁전(Palacio de Miramar)이 나옵니다. 미라마르는 스페인어로 '바다를 바라보다'라는 뜻인데, 이름 그대로 라 콘차(La Concha)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1893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왕비가 지시해 4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로, 이후 스페인 왕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됐습니다(출처: San Sebastián Turismo).
왕실이 이곳을 여름 피서지로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스페인 남부는 여름에 40도를 넘는 경우도 많은데, 북부 바스크 지방은 대서양의 영향으로 여름에도 상대적으로 서늘합니다. 가장 뷰가 좋은 자리는 언제나 왕실이나 종교 기관이 먼저 차지했다는 걸, 이 궁전을 보면서 새삼 느꼈습니다.
제가 도착했을 때 현지인들이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고 책을 읽거나 그냥 누워 있었습니다. 저도 챙겨온 돗자리를 펼치고 앉아서 한동안 바다를 바라봤는데, 솔직히 그 30분이 그날 여행 중 가장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사진을 찍어도 그 색감과 공기감이 담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셔터를 누르게 되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라 콘차만은 조개 모양의 완만한 곡선 해안선으로 유명한데, 이 특유의 형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해변 중 하나로 자주 언급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높은 곳에서 그 전체 라인을 내려다보는 경험은 직접 서 있어 봐야 실감이 납니다.
당일치기로 가면 꼭 후회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빌바오에서 산세바스티안을 당일로 다녀오는 여행자가 많습니다. 버스로 약 1시간 거리이고, 주요 명소가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모여 있으니 하루로도 불가능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당일치기는 이 도시와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었습니다.
핀초스 골목을 돌고 미라마르에서 좀 쉬고 나니, 돌아갈 버스 시간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구글 맵에서 16분으로 나오는 터미널 거리를 10분 안에 가야 하는 상황이 됐고, 가는 길에 예쁜 골목이나 귀여운 강아지가 보여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아쉬움이 꽤 컸습니다.
산세바스티안 공식 관광청에서 소개하는 해안 산책 코스는 몬테 이겔도(Monte Igueldo)에서 시작해 온다레타 해변, 미라마르 궁전, 라 콘차를 거쳐 그로스 지역과 수리올라 해변까지 이어지는 루트입니다. 이걸 여유 있게 걸으려면 최소 반나절은 필요합니다. 여기서 몬테 이겔도란 산세바스티안 서쪽 끝에 있는 전망 언덕으로, 정상에서 라 콘차만 전체의 조개 모양 해안선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또 에두아르도 칠리다(Eduardo Chillida)의 조각 작품 '바람의 빗(Peine del Viento)'도 빠뜨리기 쉬운 곳입니다. 칠리다는 산세바스티안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인데, 이 작품은 해안 바위 위에 설치된 철 조각 세 점으로 구성되어 있고, 거친 파도와 바람을 함께 받아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제가 이 작품 앞에 서지 못하고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는 게 지금도 아쉽습니다.
날씨가 흐리거나 비가 내리는 날에는 전망대 위주의 일정보다 구시가지 핀초스 투어에 집중하는 편이 만족도가 높습니다. 북부 스페인은 변덕스러운 날씨가 잦으니 얇은 겉옷 하나는 꼭 챙기는 게 좋고, 숙소를 구시가지 근처에 잡으면 저녁 핀초스 타임(저녁 7~9시)도 편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빌바오에서 산세바스티안 버스 얼마나 걸리나요?
A. 일반적으로 아반사(ALSA) 버스로 약 1시간에서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됩니다. 배차 간격이 짧은 편이지만 성수기에는 미리 예매해두는 것이 안전합니다. 제가 탔던 날처럼 기사 사정으로 운행이 지연되는 경우도 드물게 있으니 시간 여유를 두는 게 좋습니다.
Q. 핀초스 한 개 가격이 어느 정도인가요?
A. 구시가지 기준으로 핀초스 한 개에 보통 2~4유로 선입니다. 해산물이 들어간 특수 메뉴는 5~6유로까지 올라가기도 합니다. 제가 멸치·성게·새우 핀초스에 맥주 몇 잔을 곁들였을 때 26~27유로 수준이었는데, 생각보다 적게 나와서 오히려 놀랐습니다.
Q. 미라마르 궁전 입장료가 있나요?
A. 정원은 무료로 개방되어 있습니다. 건물 내부는 시즌에 따라 제한적으로 공개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방문객은 잔디 정원에서 라 콘차만을 바라보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돗자리나 간단한 음료를 챙겨가면 꽤 오래 머물게 됩니다.
Q. 산세바스티안 여행 최적 시기는 언제인가요?
A. 6월 말에서 9월 초가 날씨가 가장 안정적입니다. 다만 바스크 지방 특성상 여름에도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이 있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라 콘차 해변과 미라마르 궁전이 완전히 다른 곳처럼 예뻐지고, 흐린 날에는 핀초스 골목이 오히려 더 아늑하게 느껴진다는 게 제 경험상의 결론입니다.
결론
산세바스티안은 "볼거리가 많아서 좋은 도시"가 아닙니다. 제 경험상 이 도시는 핀초스 한 접시, 작은 맥주 한 잔, 그리고 미라마르 궁전 잔디밭에서 아무 생각 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장 오래 남았습니다.
일정을 빽빽하게 채우고 싶다면 다른 도시가 더 잘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행 중에 진짜 쉬어보고 싶은 날이 있다면, 산세바스티안에 하루를 더 얹어두는 것을 저는 지금도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