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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보르도를 '와인을 사러 가는 도시' 정도로만 알고있었습니다. 막연하게 유명한 와인 산지라는 것만 알았지, 도시 자체가 이렇게 깊은 곳인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파리에서 파업 소식이 들려오던 날 밤, 불안한 마음으로 보르도에 내렸다가 다음 날 아침 가론강 앞에서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와인보다 먼저 이 도시가 저를 붙잡았습니다.
가론강 — 보르도의 첫인상은 와인이 아니었습니다
시차 때문에 일찍 눈이 떠졌고, 별다른 기대 없이 가론강(Garonne River)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강가에 서는 순간, 그 풍경에 그만 말문이 막혔습니다. 엽서 사진보다 훨씬 선명한 일출이 수면 위로 번지고 있었습니다.
보르도 구시가지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단순히 몇 개의 건물이 아니라, 가론강변을 따라 형성된 광범위한 도심 전체가 그 대상입니다(출처: UNESCO World Heritage). 18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회암 건축물들이 줄지어 있고, 그 사이로 현대적인 트램이 지나갑니다. 중세, 르네상스, 현대가 층층이 쌓인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이 구간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곳은 부르스 광장(Place de la Bourse)과 바로 앞에 펼쳐진 물의 거울(Miroir d'Eau)이었습니다. 물의 거울은 약 2cm 깊이의 얕은 수막이 형성되었다가 안개가 분사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평면 분수입니다. 쉽게 말해 지면 자체가 거울이 되어 맞은편 18세기 건물을 그대로 비추는 구조입니다. 조성된 것은 2006년이라 역사적으로 오래된 시설은 아닌데, 그 신설 구조물이 300년 된 건물과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는 점이 오히려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침에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분수 위를 맨발로 걸어보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아이들이 물속을 들여다보고, 저녁에는 조명이 켜진 부르스 광장이 수면에 반사됩니다. 같은 장소가 시간대에 따라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보르도 관광청이 소개하는 구시가지 도보 코스도 약 5km, 3시간 규모로, 생피에르 지구와 강변을 걸어서 연결하기 좋습니다.
생테밀리옹 — 포도밭보다 토양이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와인 여행이라고 하면 시음부터 떠올리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생테밀리옹(Saint-Émilion)에서 토양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오히려 와인이 더 잘 이해됐습니다. 이 지역의 석회질 토양은 4~5세기 전부터 지면을 파내어 사용했다고 합니다. 석회암 지층이 물을 잘 머금으면서도 통기성이 좋아 와인 숙성 공간으로 천연의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생테밀리옹은 포도밭과 중세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함께 등재된 곳입니다(출처: UNESCO World Heritage). 현재 이 지역에는 900곳이 넘는 와인 생산자, 즉 샤토(Château)가 있습니다. 샤토란 단순히 '성'을 뜻하는 프랑스어가 아니라, 포도 재배부터 양조·숙성·병입까지 일괄 처리하는 독립 와인 생산 단위를 의미합니다.
저는 그중 한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Premier Grand Cru Classé) 샤토를 방문했습니다. 프리미에 그랑 크뤼 클라세란 생테밀리옹 등급 체계에서 최상위에 해당하는 분류로, 포도밭의 위치·토양·생산 방식 등을 종합 평가해 지정됩니다. 수확이 끝난 포도밭을 걷다가 혼자 남겨진 포도 한 송이를 발견했을 때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그리고 오크통 공장도 들렀는데, 이 방문이 생각보다 훨씬 기억에 남습니다. 오크통 하나 가격이 600~700유로에 달하고, 세 번 사용한 뒤에는 20유로도 안 되는 값에 팔린다고 했습니다. 오크통을 불에 구우면서 향을 입히는 토스팅(Toasting) 작업이 핵심이었습니다. 토스팅이란 열을 가해 오크 내벽을 태우는 정도를 조절하면서 바닐라·초콜릿·스모크 등의 향 성분이 와인에 배어들게 하는 공정입니다. 제가 방문했을 때는 진한 초콜릿 향이 공장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 생테밀리옹 주요 품종: 메를로(Merlot) 중심, 카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 블렌딩
- 지하 숙성고: 석회암 지층을 직접 굴착해 만든 공간, 일정한 온도와 습도 유지에 유리
- 오크통 교체 주기: 최대 3회 사용 후 폐기, 매년 막대한 비용 발생
- 토스팅 강도: 라이트·미디엄·헤비로 나뉘며 와인 스타일에 따라 주문 제작
푸아그라 — 먹기 전에 주방에서 먼저 배웠습니다
보르도가 있는 아키텐(Aquitaine) 지방은 프랑스에서도 오리 요리 전통이 특히 강한 곳입니다. 저는 처음에 푸아그라(Foie Gras)를 그냥 고급 전채 요리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방 한편에서 셰프가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푸아그라란 오리나 거위를 일정 기간 과식시켜 비대해진 간을 재료로 한 음식입니다. 이것을 약 1시간 30분에 걸쳐 저온에서 천천히 익히는 방식을 콩피(Confit) 기법이라고 합니다. 콩피란 원래 지방 속에 재료를 담가 낮은 온도로 장시간 가열해 보존성과 풍미를 동시에 높이는 조리법입니다. 쉽게 말해 기름으로 천천히 찌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맛을 보니 입안에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는 질감이었습니다. 이런 질감의 음식을 먹어본 기억이 없어서 첫 한 입에 잠시 멍했습니다. 빵 위에 올려 먹기도 하고, 샐러드와 함께 내기도 했는데, 셰프 설명에 따르면 화이트 푸아그라는 소테른(Sauternes) 와인과 반드시 함께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소테른은 보르도 남쪽에서 생산되는 귀부 와인(Botrytized Wine)입니다. 귀부 와인이란 보트리티스 시네레아(Botrytis Cinerea)라는 곰팡이가 포도 껍질에 붙어 수분을 날리면서 당도가 극도로 농축된 상태로 수확해 만드는 와인입니다. 단맛이 매우 강한데, 푸아그라의 기름진 질감과 맞붙으면 서로 균형을 잡아주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제 경우엔 처음에는 과하게 달게 느껴졌다가 푸아그라와 함께 먹으니 그제야 이해가 됐습니다.
오리 요리는 푸아그라 외에도 마그레 드 카나르(Magret de Canard, 오리 가슴살 스테이크)와 콩피 드 카나르(Confit de Canard, 오리 다리 콩피)가 대표적입니다. 이 지역에서는 오리 지방 자체도 조리에 적극 활용하는데, 오리 지방에 구운 감자는 버터 감자와는 전혀 다른 풍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보르도 여행에서 렌터카 없이 생테밀리옹 갈 수 있나요?
A. 가능합니다. 보르도 시내에서 출발하는 와이너리 투어 프로그램이 다수 운영되고 있어, 렌터카 없이도 생테밀리옹과 메독·소테른 등의 산지를 다녀올 수 있습니다. 다만 자유롭게 여러 샤토를 비교하며 다니고 싶다면 렌터카가 확실히 편합니다. 제 경우엔 가이드 투어로 첫 방문을 했는데, 현지 설명을 들으면서 가는 방식이 처음에는 오히려 더 효율적이었습니다.
Q. 물의 거울 사진 찍기 좋은 시간이 언제인가요?
A. 제 경험상 이른 아침이나 저녁 조명이 켜지는 시간대가 훨씬 좋습니다. 한낮에는 햇빛이 강하고 사람도 많아 수면 반사가 잘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개가 분사되는 타이밍과 물이 깔리는 타이밍이 번갈아 바뀌기 때문에, 10~15분 정도 여유를 두고 기다리는 편이 좋습니다.
Q. 와인을 잘 모르는데 보르도 와이너리 투어가 재미있을까요?
A. 와인을 잘 알아야만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저는 거의 모르는 상태로 가서 오히려 더 신선하게 경험했습니다. 시음보다 포도밭 토양 설명이나 오크통 제작 과정이 더 흥미로웠습니다. 와인 지식이 전혀 없다면 보르도 시내의 시테 뒤 뱅(La Cité du Vin)을 먼저 방문해 기본 감을 익힌 뒤 와이너리에 가는 것도 좋은 순서입니다.
Q. 부리(Bourru)는 보르도 어디서 맛볼 수 있나요?
A. 부리는 10월 중순에서 11월 초 사이 약 3주 동안만 맛볼 수 있는 신선한 신포도주입니다. 이 시기에 보르도를 방문한다면 지역 마켓이나 성당 행사, 와인 생산자 직판장 등에서 접할 수 있습니다. 시즌이 짧기 때문에 이 시기를 맞춰 여행을 계획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결론
보르도에 다녀오고 나서 가장 크게 바뀐 생각은 이것입니다. 이 도시는 와인을 이해하려고 가는 곳이 아니라, 와인을 통해 도시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가론강의 일출, 석회암 저장고, 오크통을 굽는 토스팅 작업, 부르스 광장에 비치는 저녁 조명, 두 시간짜리 저녁 식사가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되는 경험입니다.
일정을 짠다면 가론강 산책과 물의 거울 → 생테밀리옹 와이너리 투어 → 아키텐 지방 레스토랑 저녁 식사 흐름으로 잡는 것을 제 경험상 가장 권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루 오후는 비워두십시오. 보르도는 서두르면 놓치는 도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