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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리가(Riga)를 목적지로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폴란드 크라쿠프로 가는 직항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경유지로 잡은 도시였거든요. 그런데 막상 발을 들여놓고 나서는 "여기 집 구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이 진지하게 들었습니다. 발트해 연안의 라트비아 수도 리가, 기대 없이 갔다가 가장 오래 머물고 싶어진 도시 이야기입니다.
아르누보 거리, 예상보다 훨씬 충격적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걷는 내내 솔직히 실망스러웠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소비에트 시절 지어진 콘크리트 블록 아파트들이었고, 탈린의 동화 같은 올드타운이 자꾸 머릿속에 밟혔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탈린에 하루 더 있을걸"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데 아르누보(Art Nouveau) 지구에 들어서는 순간 그 생각이 통째로 뒤집혔습니다. 아르누보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 유럽에서 유행한 건축 및 예술 양식으로, 꽃과 식물의 곡선, 여성의 얼굴, 신화 속 생명체 같은 자연물을 건물 외벽 장식에 그대로 녹여낸 것이 특징입니다. 쉽게 말해 건물 자체가 하나의 조각 작품인 셈입니다.
리가의 엘리자베테스 거리(Elizabetes iela)와 알베르타 거리(Alberta iela)는 건축가 미하일 에이젠슈타인(Mikhail Eisenstein)이 직접 설계한 아르누보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곳입니다. 제가 직접 걸어봤는데, 이걸 '거리'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싶을 만큼 건물 하나하나가 달랐습니다. 1제곱센티미터도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 벽면 전체를 조각과 문양으로 채워놓은 걸 보면서, 이 설계자가 미에 대한 결벽증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리가 역사 지구는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UNESCO World Heritage)에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란 인류 전체의 입장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닌다고 인정된 유산으로,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보호하기로 약속한 장소를 말합니다(출처: UNESCO World Heritage Centre). 등재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아르누보 건축물의 밀집도와 예술적 완성도였습니다.
제 경험상 이 거리는 오전에 방문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오후가 되면 프리 워킹 투어(Free Walking Tour) 그룹이 여러 팀씩 몰려들어 사진 찍기가 쉽지 않습니다. 프리 워킹 투어란 정해진 요금 없이 가이드를 따라 도시 주요 명소를 걷는 여행 방식으로, 끝날 때 자유롭게 팁을 주는 구조입니다. 리가에서만 다섯 그룹을 만났을 정도니, 그 자체로 이 거리의 인기를 증명하는 셈입니다.
아르누보 지구를 본 뒤에는 구시가지 안 올드타운도 다르게 보였습니다. 고양이 조각상이 지붕에 올라간 '고양이의 집(Cat House)'이나 화려한 파사드(Facade, 건물의 정면부)로 유명한 검은머리전당(House of the Black Heads)도 이제는 단순한 포토 스팟이 아니라 리가가 수백 년간 쌓아온 미적 감각의 연장선으로 읽혔습니다.
- 알베르타 거리(Alberta iela) — 아르누보 건축 밀집 구간, 에이젠슈타인 설계 건물 다수
- 엘리자베테스 거리(Elizabetes iela) — 아르누보 거리의 시작점, 도보 이동 가능
- 검은머리전당(House of the Black Heads) — 14세기 상인 길드 건물, 구시가지 대표 랜드마크
- 고양이의 집(Cat House) — 지붕 위 고양이 조각상으로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 건물
중앙시장과 현지 음식, 도시의 진짜 얼굴을 여기서 봤습니다
제가 직접 가보기 전까지는 중앙시장을 그냥 관광객용 재래시장쯤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들어서는 순간 규모에 먼저 압도됩니다. 리가 중앙시장(Rīgas Centrāltirgus)은 1930년대에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사용하던 비행선 격납고(Zeppelin Hangar) 구조물을 그대로 활용해 만든 시장입니다. 격납고란 비행선이나 항공기를 보관하던 대형 격납 구조물을 말하는데, 그 거대한 아치형 지붕 안에 과일, 채소, 생선, 육류, 유제품 코너가 각각 독립된 건물로 들어서 있습니다(출처: Rīgas Centrāltirgus 공식 사이트).
제 경험상 이런 시장은 오전 10시 이전에 가야 제맛입니다. 신선한 베리류와 버섯이 쏟아져 나오고, 할머니들이 자기 텃밭에서 직접 따온 듯한 소량의 채소를 파는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블루베리 2.5킬로그램짜리 봉지를 앞에 두고 "다 못 먹을 것 같아서" 내려놓은 게 지금도 아쉬울 정도입니다.
생선 코너는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훈제 청어, 절인 연어, 각종 알류까지 다양한 해산물이 쌓여 있었는데, 흑빵 위에 라임에 절인 청어와 양파를 올린 오픈 샌드위치를 한 입 먹는 순간 이 도시가 해산물을 제대로 다룰 줄 아는 민족이라는 걸 바로 알게 됐습니다. 한 개에 0.8유로, 정말 강력히 추천합니다.
라트비아 음식 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게 꿀케이크(Honey Cake)와 나폴레옹 케이크(Napoleon Cake)입니다. 꿀케이크는 꾸덕한 질감에 꿀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고, 나폴레옹 케이크는 여러 겹의 패스트리(Pastry, 밀가루 반죽을 겹겹이 쌓아 만든 페이스트리 빵) 사이에 커스터드 크림이 듬뿍 들어 있습니다. 달지 않고 바삭한 식감이 커피와 잘 어울렸는데, 150년 전통 베이커리에서 먹었다는 사실이 맛을 더 맛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리가를 대표하는 술로는 리가 블랙 발잠(Riga Black Balsam)이 있습니다. 블랙 발잠이란 라트비아 전통 허브 리큐어(Liqueur)로, 45도짜리 알코올에 다양한 약초와 식물 추출물을 혼합해 만든 것입니다. 쉽게 말해 서양식 한방 담금주 같은 느낌인데, 차에 타거나 칵테일 베이스로 쓰기도 합니다. 중앙시장 안 주류 코너에서는 슈퍼마켓보다 약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한 가지 더 챙겨두면 좋은 팁이 있습니다. 외곽 노점에서는 카드 결제가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직접 써봤는데 안쪽 상설 매대는 카드가 되지만, 할머니들이 자리를 펴놓은 바깥쪽 노점은 현금만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소액 현금을 넉넉히 챙겨가는 게 낫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리가 여행, 며칠 정도 잡아야 하나요?
A. 아르누보 지구와 중앙시장, 구시가지를 여유 있게 보려면 최소 2박 3일은 필요합니다. 3박 4일이면 근교 해변 휴양지 유르말라(Jūrmala)까지 다녀올 수 있어서 훨씬 풍성해집니다. 주요 명소만 빠르게 보는 1박 2일 일정은 표면만 훑고 끝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Q. 리가에서 영어가 통하나요? 러시아어를 알아야 하나요?
A. 라트비아의 공용어는 라트비아어이며, 관광지와 숙소, 음식점에서는 영어만으로 충분히 소통이 됩니다.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일반 여행객이 러시아어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 상황은 없었습니다. 시장 외곽 노점 할머니들과 소통이 어려울 때도 손짓과 숫자로 해결이 됐습니다.
Q. 리가 물가는 어느 정도인가요?
A. 서유럽 주요 도시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한 편입니다. 구시가지 안 레스토랑은 1인 기준 20~30유로 선이고, 중앙시장에서 장을 봐서 숙소 부엌에서 해결하면 하루 식비를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다만 성수기 구시가지 숙박비는 예약 시점에 따라 차이가 크므로 일찍 예약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Q. 리가 중앙시장 운영시간이 어떻게 되나요?
A. 일반적으로 실내 시장은 오전 7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는 것으로 안내되어 있으나, 구역별로 운영시간과 휴무일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방문 전에 공식 사이트에서 최신 정보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오전 중에 방문하면 식재료가 가장 신선하고 인파도 적어서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Q. 탈린이랑 리가, 둘 중 어디가 더 나은가요?
A. 두 도시는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탈린이 아담하고 정갈한 중세 올드타운의 정수라면, 리가는 훨씬 크고 활기차며 아르누보 건축이라는 독자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어느 쪽이 낫다기보다 둘 다 각자의 이유로 가볼 만합니다. 저는 오히려 두 도시를 비교하며 걸을 수 있었던 게 발트 3국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결론
리가는 처음부터 기대하고 가는 도시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저처럼 어쩌다 들르게 된 사람도 시간이 지날수록 이 도시의 층위를 하나씩 발견하게 됩니다. 아르누보 건축의 화려함, 중앙시장의 활기, 흑빵 위 청어 한 점의 담백함까지 겹쳐지면, 탈린에 대한 미련은 어느 순간 슬그머니 사라집니다.
리가를 처음 간다면 구시가지 숙소를 잡되, 첫날 오전에 아르누보 지구를 먼저 걷고 오후에 중앙시장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순서를 추천합니다. 이 순서대로만 움직여도 리가가 왜 유럽의 숨은 여행지로 불리는지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유명 관광지에 지쳤다면, 리가는 지금 당장 후보에 올릴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