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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을 계획하면서 발렌시아를 일정에 넣어야 할지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마드리드도, 바르셀로나도 아닌 그 도시를 굳이 가야 하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막상 발을 딛는 순간, 이 도시가 왜 최근 들어 디지털 노마드와 장기 체류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있는지 바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마드리드의 혼잡함도, 바르셀로나의 관광지 피로감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발렌시아 구시가지, 걷다 보면 역사가 쌓인다
발렌시아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이라면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수 있습니다. 제가 권하는 출발점은 북역(Estació del Nord)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기차역을 왜 관광지 첫 번째로 꼽는 걸까요?
북역은 1917년에 완공된 건물로, 그 자체가 발렌시아의 랜드마크입니다. 아르누보(Art Nouveau) 양식으로 지어진 이 역사는 화려한 모자이크 장식과 오렌지 문양의 파사드가 압권인데요. 여기서 아르누보란 19세기 말~20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한 예술 양식으로,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선적 장식이 특징입니다. 역 안에서 서둘러 나오지 않고 목조 티켓 창구와 천장 장식을 천천히 둘러봤는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기차역에서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 줄 몰랐거든요.
북역을 나와 조금 걸으면 발렌시아 시청사와 시청 광장(Plaça de l'Ajuntament)이 나옵니다. 이곳은 1년 내내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리는 도시의 중심부로,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시청사 내부와 2층 발코니에서 광장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제가 직접 올라가 봤는데, 탁 트인 광장 뷰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광장에서 북쪽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시우타트 벨라(Ciutat Vella), 즉 구도심의 핵심 지역이 펼쳐집니다. 발렌시아 대성당은 13세기 이슬람 모스크가 있던 자리에 약 200년에 걸쳐 지어진 건물로, 미칼레 종탑에 올라 발렌시아 구도심의 지붕선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이 성당이 유명한 또 다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성배(Santo Cáliz)를 보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성배란 종교적·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성물로, 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박물관에서 직접 관람할 수 있습니다.
대성당 근처에 있는 라 론하 데 라 세다(La Lonja de la Seda)는 자주 놓치기 쉬운 곳인데, 제 경험상 이건 꼭 들러야 할 장소였습니다. 라 론하 데 라 세다란 '비단 거래소'를 뜻하는 스페인어로, 발렌시아가 15세기 지중해 무역의 핵심 거점이었던 시절 실크 상인들이 계약을 체결하던 장소입니다. 현재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출처: UNESCO 세계문화유산 목록), 고딕 양식의 거래소 홀 내부는 발렌시아의 전성기를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엘 카르멘(El Carmen) 지역은 발렌시아 구도심 중에서도 가장 개성 있는 동네입니다. 콰르트 타워(Torres de Quart)와 세라노 타워(Torres de Serrans), 이 두 개의 중세 성문 타워 사이에 자리한 이 지역은 좁은 골목마다 그래피티와 작은 카페, 독립 서점이 가득합니다. 특별한 목적지 없이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던 곳이고, 특히 오후 햇살이 골목 안으로 스며드는 시간대가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구도심에서 놓치면 아쉬운 곳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북역(Estació del Nord) — 아르누보 양식의 모자이크 장식과 오렌지 파사드. 역 내부를 천천히 감상
- 발렌시아 대성당 — 미칼레 종탑 전망, 성배 관람, 오디오 가이드 포함 입장 추천
- 라 론하 데 라 세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비단 거래소. 성당보다 덜 알려졌지만 역사적 가치 높음
- 메르카도 센트랄(Mercat Central) — 아르누보 건물의 대형 전통 시장. 신선 주스·하몽·해산물 구경
- 엘 카르멘 — 그래피티와 카페가 어우러진 발렌시아 특유의 골목 문화
뚜리아 정원과 빠에야, 발렌시아의 진짜 매력
구시가지를 다 돌고 나면 발렌시아를 어느 정도 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물음이 생깁니다. 이 도시가 관광지보다 '살고 싶은 도시'로 더 자주 언급되는 이유가 뭘까요?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그 답이 뚜리아 정원(Jardí del Túria)에 있었습니다.
뚜리아 정원은 도시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8km 길이의 선형 공원입니다. 선형 공원(linear park)이란 강이나 도로처럼 길게 이어진 선 형태의 녹지 공간을 말하는데, 발렌시아의 경우 1957년 대홍수 이후 강의 흐름을 도시 외곽으로 우회시키고 그 옛 강바닥을 공원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유럽에서도 이런 대규모 도시 재생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 자전거 도로, 조깅 트랙, 축구장, 스케이트 파크, 어린이 놀이터까지 갖춰져 있어 주말이면 현지 가족들로 가득 찹니다. 제가 이 공원을 걸었을 때 느낀 건 관광지가 아니라 진짜 일상의 공간이라는 감각이었습니다.
뚜리아 정원의 남쪽 끝에 자리한 예술과 과학의 도시(Ciutat de les Arts i les Ciències)는 발렌시아 출신 건축가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가 설계한 복합 문화 공간입니다. 1990년대 말 완공된 이 공간에는 발렌시아 오페라 하우스(Palau de les Arts Reina Sofía), 과학관(Museu de les Ciències), 유럽 최대 규모 중 하나인 수족관(L'Oceanogràfic)이 모여 있습니다. 구시가지의 고딕 건물들을 보다가 갑자기 SF 영화 세트장 같은 풍경이 펼쳐지는 이 대비가 발렌시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입니다.
발렌시아 하면 빠에야(Paella)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빠에야는 쌀을 베이스로 사프란, 채소, 고기 또는 해산물을 넣어 넓고 얕은 팬에 조리하는 스페인 전통 요리로, 발렌시아가 본고장입니다. 스페인 정부 관광청 자료에 따르면, 정통 발렌시아 빠에야는 닭고기와 토끼고기, 그리고 로파스코(bajoqueta, garrofó) 콩을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며, 해산물 빠에야는 별도의 변형 레시피입니다(출처: Spain Tourism Official). 말바로사(Malvarrosa) 해변 근처 레스토랑에서 먹은 빠에야는 제 경험상 그냥 맛있는 쌀 요리가 아니라 발렌시아라는 도시 자체의 맛이었습니다.
해변 이야기를 하자면, 말바로사와 아레나스(Las Arenas) 해변은 구도심에서 버스로 20분, 자전거로도 20여 분이면 닿을 수 있습니다. 여름 성수기를 피한 시기에 방문하면 모래사장이 훨씬 여유롭고, 지중해의 잔잔한 파도와 넓은 수평선을 오롯이 즐길 수 있습니다. 카바냘(Cabanyal) 지역은 해변 바로 옆에 있는 동네인데, 타일 장식이 특징인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즐비해 걷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운 곳입니다. 다만 숙소를 이 지역에 잡는 것은, 구시가지와 거리가 있어서 매일 물놀이가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권하지 않습니다.
루사파(Russafa)는 발렌시아의 감각적인 젊음을 보고 싶다면 반드시 가야 하는 동네입니다. 독립 카페, 빈티지 숍, 다국적 음식점이 좁은 블록 안에 빽빽이 들어서 있고, 저녁이 되면 현지 청년들과 외국인 관광객이 뒤섞여 활기가 넘칩니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와 비교해 물가가 눈에 띄게 낮다는 점도 루사파를 더 오래 즐기게 만드는 이유였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발렌시아 여행은 며칠이 적당한가요?
A. 주요 관광지만 빠르게 돌면 2일도 가능하지만, 제 경험상 뚜리아 정원 산책, 메르카도 센트랄 구경, 해변까지 여유 있게 즐기려면 최소 3박 4일은 잡는 게 좋습니다. 실제로 일정을 짜다 보면 하루 이틀 더 머물고 싶어지는 도시입니다.
Q. 발렌시아 숙소는 어디에 잡는 게 가장 좋나요?
A. 시청 광장(Plaça de l'Ajuntament), 레이나 광장(Plaça de la Reina), 북역 주변이 가장 무난합니다. 이 세 지점을 중심으로 잡으면 구도심 대부분을 도보로 커버할 수 있습니다. 가격이 부담스럽다면 루사파 지역도 대중교통 접근성이 좋아 대안이 됩니다.
Q. 발렌시아 공항에서 시내까지 어떻게 이동하나요?
A. 지하철 3호선 또는 5호선을 타고 샤티바(Xàtiva) 역에서 내리면 북역과 바로 연결됩니다. 이동 시간은 약 20~30분 수준이고, 티켓은 메트로발렌시아 앱에서 편리하게 구매할 수 있습니다.
Q. 정통 발렌시아 빠에야는 어디서 먹어야 하나요?
A. 말바로사 해변 인근 레스토랑들이 정통 발렌시아 빠에야로 유명합니다. 메뉴에 "Paella Valenciana"라고 명시된 곳을 고르면 닭고기와 토끼고기, 콩을 사용한 원조 레시피를 맛볼 수 있습니다. 구시가지 안의 관광지 식당보다 해변 쪽이 가성비 면에서 나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Q. 예술과 과학의 도시는 입장료가 있나요?
A. 건물 외관과 주변 광장은 무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 수족관(L'Oceanogràfic), 과학관(Museu de les Ciències), 오페라 하우스 공연 등은 각각 유료로 운영되며, 공식 홈페이지에서 사전 예약 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도 시간이 부족할 만큼 볼거리가 많은 공간입니다.
결론
발렌시아는 퀘스트 깨듯 관광지를 소화하는 여행보다 시장에서 현지인 어깨를 스치고, 광장 카페 테라스에서 오르차타(Horchata) 한 잔 마시고, 공원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는 여행이 훨씬 잘 어울리는 도시입니다. 오르차타란 발렌시아 지역의 전통 음료로, 추파(chufa)라 불리는 땅속 구황작물을 갈아 만든 달콤하고 고소한 음료입니다. 처음에는 하루 이틀이면 충분할 것 같았지만, 막상 가보면 하루 이틀 더 머물고 싶어지는 도시라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서 이미 지쳐버린 분이라면, 발렌시아는 그 피로를 씻어주는 도시가 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구시가지 도보 여행으로 하루, 뚜리아 정원과 예술과 과학의 도시로 반나절, 해변과 빠에야로 마무리하는 흐름이 제가 경험한 것 중 가장 균형 잡힌 일정이었습니다.